도서 사형집행관 리뷰
이러한 독특한 책을 발견하는 것은 오늘날 베스트셀러로 넘쳐나는 서점에서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이 책이 과거에 출간되어 크게 주목받지 못한 프랑스 소설이라는 점은 더욱 주목할 만하다.
낭만적 요소를 전혀 포함하지 않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느 편집자의 추천 목록에서 이 책을 발견한 것은 순수한 우연이었다.
그러나 이 작은 우연은 나에게 예상치 못한 큰 영향을 미쳤다. 책을 열자마자 나는 작가의 사진과 그의 말에 마주하게 되었고, 그의 깊은 눈빛과 진솔한 말들은 나를 깊이 사로잡았다.
작가는 어린 시절부터 망태 할아버지가 되는 것을 꿈꿨지만, 그 꿈이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더 위대한 존재가 되고자 했다고 회상한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사형제도가 폐지되면서 그 꿈도 사라졌다고 말한다. 결국, 그는 자신의 꿈과 실망,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얻은 깨달음을 이 책에 담아내기로 결심했다.
작가의 깊은 눈빛을 다시 바라보며, 나는 그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해 보게 되었다. 이 책은 단순히 과거의 사형제도나 중세 시대의 어두운 이야기들을 다루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내면세계와 그 어두운 면을 탐구하고자 하는 작가의 의도가 담겨 있었다. 비록 이야기의 전개 과정에서 그 합리성이 흔들리는 부분이 있긴 하지만, 그것은 과거의 시대적 상황과 불합리성을 반영하는 것일 뿐이다.
이 책을 통해 작가는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인간의 내면적 고민과 어두운 면을 섬세하게 탐구하고 있었다. 낭만적이지 않은 이 프랑스 소설을 우연히 만난 것은 나에게 큰 의미를 가진다.
이 작품은 독특한 매력과 깊은 사유를 통해 독자들에게 영감을 준다. 작가의 깊은 생각과 그가 전하고자 한 메시지는 시간이 흘러도 여전히 유효하며, 인간의 본성에 대한 이해를 더욱 깊게 해준다.
1683년 무더운 여름, 프랑스 루에르그 지역의 소박한 벨레로카이유 남작령은 한 충격적인 영아살해 사건으로 인해 그 평화가 깨어졌습니다.
이 사건은 단순한 범죄 이상의 의미를 지니며, 지역 사회에 큰 충격과 공포를 안겨주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이 끔찍한 범죄에 대한 정의를 갈망했고, 범인에 대한 처벌을 촉구했습니다.
이 사건의 진상은 더욱 충격적이었습니다. 세공업을 영위하는 크레스피아제는 단순히 벌에 쏘인 후 향료를 과하게 사용한 피에르 갈린을 몽둥이로 때려 벌을 준 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러나 이 사소한 일로 인해 앙심을 품은 피에르 갈린은 참혹하고 잔인한 복수를 계획했습니다. 그는 크레스피아제의 무고한 아들을 잔인하게 살해한 뒤, 그 유해를 가공하여 크레스피아제 부부에게 먹였다는 충격적인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이 끔찍한 사실이 알려지자, 마을 사람들은 분노했고, 피의 복수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남작령에는 사형집행인이 없어 이를 수행할 방법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감옥에는 세 명의 좀도둑이 갇혀 있었으며, 그 중 한 명은 특별한 과거를 가진 쥐스티니엥이었습니다.
어린 시절 코를 잃고 양부모의 보살핌 아래에서 자란 그는 유랑단의 여인에게 마음을 빼앗겨 결국 수도원에 불을 지르고 양부모의 재산을 훔쳐 도망치는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이 과정에서 다른 두 도둑과 함께 붙잡혀 감옥에 갇히게 되었지만, 그의 능력은 감옥 관리인 보루이의 관심을 끌었습니다.
보루이의 추천으로 왕의 갤리선 노예가 될 운명에서 벗어나 사면을 받게 되었지만, 그에게 주어진 운명은 사형집행관이라는 또 다른 형태의 어둠이었습니다.
쥐스티니엥은 이 새로운 역할에 대한 준비를 마치고, 사형집행관으로서의 삶을 시작합니다. 이 직업은 그에게 사회적으로 큰 차별을 가져다주었지만, 동시에 특정한 권리와 특권도 부여되었습니다.
그의 삶과 가문의 이야기는 사형제도가 폐지될 때까지 이어지며, 그의 후손들은 이 어둠의 직업을 대대로 승계했습니다.
쥐스티니엥의 후손들은 각기 다른 시대와 상황 속에서 사형집행관의 역할을 수행하며, 그들의 삶은 끊임없는 고뇌와 갈등, 그리고 때때로는 의외의 영웅주의를 경험합니다.
이들의 이야기는 단순히 사형집행관으로서의 역할에 국한되지 않고, 당시 사회의 정치, 종교, 법률이 어떻게 개인의 운명을 좌우하는지에 대한 통찰을 제공합니다.
19세기 초, 프랑스 대혁명이 발발하면서 쥐스티니엥의 후손 중 한 명, 알렉산더는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자신의 역할에 대해 깊이 성찰하게 됩니다.
혁명기에는 기존의 사회 질서가 무너지고 새로운 질서가 수립되는 과정에서, 알렉산더는 과거의 전통을 고수하면서도 새로운 시대의 요구에 부응하려 애씁니다.
그는 국왕의 사형집행을 명령받게 되고, 이 일로 인해 극심한 내적 갈등을 겪습니다. 하지만 최종적으로는 자신의 직업적 의무를 수행함으로써, 혁명의 기운 속에서도 한 개인의 양심과 의무 사이에서 균형을 찾으려 노력합니다.
알렉산더의 이야기는 단지 한 사형집행관의 고뇌에 그치지 않고, 당시 프랑스 사회가 겪고 있던 근본적인 변화와 갈등을 반영합니다.
대혁명은 프랑스뿐만 아니라 전 유럽에 영향을 미쳤고, 그 여파는 오랫동안 지속되었습니다. 알렉산더와 같은 개인의 삶을 통해, 우리는 역사적 사건이 개인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며, 한 개인이 그러한 변화의 한가운데서 어떻게 자신의 길을 찾아가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쥐스티니엥 가문의 이야기는 시대를 아우르며 계속됩니다. 각 세대는 자신들의 시대와 맞닥뜨린 도전에 대응하며, 때로는 사회적 낙인과 차별 속에서도 그들만의 정체성과 가치를 지켜나갑니다.
이 가문의 이야기는 개인의 운명이 역사의 흐름 속에서 어떻게 형성되고 변화하는지, 그리고 개인이 사회와 역사 속에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깊은 성찰을 제공합니다.
위의 줄거리가 중심 내용이라면 남작이 훌륭한 기사로써 활동하던 중세의 배경을 그리고 있는 것은 부가적인 내용이라 할 수 있다.
당시의 정의란 무엇인지 오늘날과 비교하여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도 가질 수 있다. 사형제의 존속 혹은 폐지라는 오늘날의 분위기도 옛 시대와 별로 달라 보이지 않는다.
정의는 영원성을 지녀야 한다지만, 역시 시대에 따라서 요구가 달라지고 있음을 인식하게 된다. 정의란 진정 무엇이어야 하는 걸까? 하는 의문을 가져본다.
위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살펴보면, 중세 시대의 배경 아래에서 남작이 용감한 기사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모습은 이야기의 부가적인 측면으로 여겨질 수 있습니다.
이 시대적 맥락 속에서 벌어지는 정의의 개념에 대해 깊이 있게 탐구해 볼 기회를 제공합니다. 현대와 비교해볼 때, 당시에 어떻게 정의를 바라보았는지, 그리고 현대의 정의 개념과 어떻게 다른지를 비교해보는 것은 흥미로운 사유의 여정이 될 수 있습니다.
또한, 사형제도의 유지 또는 폐지에 대한 현대 사회의 논의는 옛 시대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이는 면이 있습니다.
정의는 시대를 초월해야 한다고들 하지만, 실제로는 시대마다 다른 요구와 기대를 반영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로 인해, 정의가 진정으로 무엇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정의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시대적 맥락에 따라 변화하고 발전하고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중세의 기사가 겪는 고뇌와 그 시대 사회의 정의 관념, 현대 사회에서의 사형제도에 대한 논의는 모두 정의의 본질에 대한 우리의 탐색을 더욱 깊게 만듭니다.
정의는 단순히 법률이나 규범에 의해서만 규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시대와 사회의 도덕적, 윤리적 가치관에 의해 형성되고 재해석되는 개념임을 깨닫게 됩니다.
따라서, 정의에 대한 우리의 탐구는 단순히 역사적 사실이나 법률적 텍스트에 국한되지 않고, 인간의 도덕성과 윤리성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포함하게 됩니다.
이렇게 볼 때, 정의란 시대와 사회의 변화에 따라 그 모습을 달리하는, 동시에 우리 모두가 공유해야 할 보편적 가치의 하나로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정의에 대한 지속적인 탐구와 논의는 우리 사회가 보다 공정하고 정의로운 방향으로 나아가는 데 필수적인 요소가 됩니다. 결국, 정의에 대한 우리의 고민과 탐색은 인간으로서의 존엄성과 가치를 지키고 실현하기 위한 끊임없는 노력의 일환이 될 것입니다.